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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경제

삼성의 역사 3편: 이건희와 삼성의 새로운 사업들

by 아침에커피넉잔 2024. 4. 13.

 

삼성의 역사 2편 삼성의 시련과 발전에 이어 
3편 이건희와 삼성의 새로운 사업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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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9. 이건희의 어린 시절
20. 삼성그룹 후계자 확정
21. 삼성과 반도체 사업
22. 삼성의 2대 회장 이건희
23. 삼성의 재산분할
24. 이건희와 진돗개
25. 삼성과 모바일 사업(휴대폰)
26. 삼성과 자동차
27. 삼성과 외환위기
28. 삼성의 3대 회장 이재용
29. 삼성 경영권 승계 비리

 


19. 이건희의 어린 시절

1942년 1월 9일, 병철이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를 운영하고 있던 당시
일곱 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인 건희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건희는 젖을 뗀 시점부터
의령에 있던 친할머니 권재림에게 보내져 길러졌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을 다닐 무렵 다시 대구로 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데,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탓에 한동안 가족들을 낯설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가족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3년,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건희는
아버지 병철의 권유로 어린 나이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병철은 아들들이 선진국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길 원했고
앞서 첫째 아들 맹희는 도쿄대학 농대를 둘째 아들 
창희는 와세다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건희는 둘째 형 창희와 함께 살면서 도쿄에 있던 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일본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건희는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생각을 아주 깊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영화를 즐겨보며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일주일에 3일 정도는 거의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영화를 통해 일본어와 영어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했는데, 
주인공의 입장뿐 아니라 조연, 감독, 
카메라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입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3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친 뒤, 건희는 서울사대 부속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고
졸업 후엔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레슬링부에 들어가서 열심히 레슬링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가 레슬링부에 들어간 것은 일본 유학 당시에 봤던 레슬링 경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재일교포 출신 프로 레슬러, 역도산에게 매료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레슬링을 시작한 건희는 웰터급 선수로 전국 대회에 출전해
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건희는 공부보다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엔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스스로도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고 인정하며
대신 와세다 대학 골프클럽에서 가입하여 골프의 
에티켓과 매너를 세밀하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럭비, 탁구, 테니스 등 다양한 스포츠도 즐겼습니다. 

그래서인지 훗날 건희는
"심판이 없는 골프에서는 자율을 야구에서는 팀워크를, 
럭비에서는 투지를 배워야한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건희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자 병철을 더 큰 세상을 경험하라며 
미국 조지워싱턴 경영 대학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건희는 전공으로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공부에 별 흥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건희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동차였습니다. 
그는 1년 반의 미국 유학 생활 동안 6번이나 자동차를 바꿨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서 그냥 이것저것 바꿔 탄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사고팔 때마다 600~700달러 정도의 차액을 남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동차 구조에도 관심이 많아서 자동차를 직접 뜯고 조립하며 
전문가 수준의 자동차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었습니다.
한편, 이때까지만 해도 병철은 건희를 삼성의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어 계열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희의 대학원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시키기도 했던 겁니다. 
1966년, 건희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동양방송에 입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이 되자, 병철은 건희를 중앙 매스컴 이사를 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69년, 둘째 형 창희가 아버지 병철을 투서한 청와대 투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게 막내아들이던 건희는 갑자기 삼성 그룹의 후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건희 삼성 2대 회장 출처-나무위키
이건희 삼성 2대 회장 출처-나무위키


20. 삼성그룹 후계자 확정

1974년,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동양방송, TBC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 이후, 한국이 새로운 
첨단 산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 건희는 오일쇼크로 인해 한 회사가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바로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였습니다. 
건희는 우선 '반도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반도체 산업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며 먼지 한 톨도 
용납할 수 없는 아주 깨끗한 환경에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재주가 뛰어나며 
집에서는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청결면에서도 강점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병철에게 "아버지, 반도체는 주식회사와 원자력과 함께
미래의 역사를 바꿀 3대 발명품입니다.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 사업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라며 삼성 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를 건의했습니다. 

당시 반도체 산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5조~6조 원이 필요했으며
1개의 반도체 라인을 만드는 데만 해도 1조 원이나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반도체가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타사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개발하면 초 대박이 날 수도 있었지만 
타사보다 조금만 늦어도 완전 쪽박이 나는 리스크가 아주 큰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철은 아직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하여 건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74년 12월 6일,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버렸습니다. 
건희는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직 한국반도체의 기술이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겁니다. 

비실비실한 상태로 겨우 버티고 있던 한국반도체는
결국 1977년 12월,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삼성반도체 주식회사가 되었다가
1980년 1월, 삼성전자에 흡수되어 반도체사업부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체 설계 기술이 없었던 탓에 반도체사업부는 계속 
적자상태를 유지하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미운 오리로 낙인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병철은 직접 나서서 반도체사업부를 살려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병철은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의 한 반도체회사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그 반도체회사 회장은 직원들을 보내 
삼성반도체의 부천공장을 방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을 방문한 이후 어떠한 피드백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머지 않아 경쟁사가 될 업체에게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아니, 도대체 반도체가 뭐고?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이날 이후로 병철은 반도체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77년, 한국반도체가 삼성그룹의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1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병철은 급히 건희를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취합니다.

일반적으로 재산을 상속할 때, 부모가 살던 집은 장남이 물려받는데, 
병철은 자신이 살고 있던 장충동 본가를 건희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그렇게 1979년 2월, 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21. 삼성과 반도체 사업

1983년 2월 8일, 반도체에 대해 오랜 기간 공부하며 고민해 온 
병철은 도쿄에서 한국에 있던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에게 전화하여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밀고 나가겠다.'라고 선언했고 
이 소식은 중앙일보를 통해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을 '도쿄 선언'이라 부릅니다. 


삼성전자의 첫 번째 반도체 사업 목표는
당시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이던 '64K D램'을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설계도면을 마이크론으로부터 들여온 뒤,
나머지 모든 공정 프로세스를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83년 12월 1일,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1984년 8월부터 삼성전자는 64K D램을 본격적으로 출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마이크론 등 선진 반도체 회사는 256K D램을 출시했고
삼성을 의식하며 64K D램의 가격을 확 낮춰버렸습니다. 

결국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수년간 무려 1,200억 원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병철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면서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에 담담히 다음 개발은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84년 10월에 256K D램 양산에 성공했으며
 1986년 7월에는 1M D램을 설계부터 
모든 공정까지 독자기술로 개발하게 됩니다.

이 무렵 병철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었습니다. 
1976년에 위암수술, 1979년에 뇌수술을 받았던 그는
1986년부터는 집에서 요양하며 손주들을 돌봤다고 하는데 
그래서 많은 업무가 건희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은 삼성, 현대, 금성이 4M D램을 공동 개발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기업이 별도로 개발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반도체는 웨이퍼라는 원판 위에
1M D램까지는 웨이퍼에 단층으로 칩을 쌓아서 제작이 가능했지만, 
1M D램까지는 웨이퍼에 단층으로 칩을 쌓아서 제작이 가능했지만,
4M D램때부터는 반도체 용량이 커지며 단층으로만 
쌓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4M D램 개발을 위해서는 2가지 제작 방식 중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웨이퍼 표면을 아래로 파고 내려가서 집적도를 높이는 트렌치 공법과
웨이퍼 표면에 새로운 층을 쌓아 집적도를 높이는 스택 공법. 
이 두 가지 공법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트렌치 공법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밑으로 파낼수록 회로가 
보이지 않아서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졌으며
스택 공법은 작업이 쉽고 경제성이 있지만 품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건희는 개발 방식의 선택을 위해 전자공학 박사 두 명을 
불러 두 공법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트렌치 공법은 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지만,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그 속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트렌치는 검증할 수 없지만, 스택은 검증이 가능합니다. 
이 점이 핵심 차이입니다."
이 얘기를 건희에게 전한 이들은 권오현 박사와 진대제 박사였습니다. 

참고로 권오현 박사는 2018년 3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삼성전자 회장을 지내고
현재 삼성전자 고문으로 있는 인물이며 진대제 박사는 
노무현 정부 당시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현재 한국블록체인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건희는 이들의 얘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스택공법보다 트렌치 공법을 선택했으며
우리나라의 현대전자도 트렌치 공법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건희는 위로 쌓는 방식인 스택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4M D램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87년 11월 19일, 삼성그룹 1대 회장 병철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22. 삼성의 2대회장 이건희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46살의 나이로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됩니다.
건희는 취임식에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라며
강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1988년 2월,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을 이용한 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반도체 선두업체와의 격차를 상당히 좁힐 수 있었습니다. 
1988년 3월 22일,
삼성상회에 세워지며 시작된 삼성의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건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거대한 생명체 위대한 내일을 약속하는 제2창업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이것을 제2창업 선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건희는 자신의 생각대로 삼성그룹의 사업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합니다.
연관성이 있었던 가전, 반도체, 휴대폰 계열사 등을 삼성전자로 한데 묶은
통합 삼성전자가 출범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주산업과 유전공학 등 새로운 사업 진출 의지도 밝혔습니다.
1988년, 4메가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전년 대비 무려 176%나 성장하며 매출액 6천7백억 원, 누적적자를 
제한 순 이익이 1,600억 원에 이를 만큼 성장했던 겁니다.
그리고 1990년 8월, 세계 선두 업체들과 거의 동시에 16메가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선두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트렌치 공법 대신 스택 공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얘기합니다.
그렇게 삼성은 안정적으로 체제 변화가 이뤄지고 점점 더 성장해 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던 1993년 6월 7일, 건희는 명언을 남깁니다. 


23. 삼성의 재산분할

1987년, 초대 회장이던 병철의 죽음 이후 삼성그룹은 
병철의 재산을 분할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됩니다.
특히 1991년, 병철의 차남 창희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병철의 자녀들 간의 재산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병철과 두을 사이에는 3남 5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이중 여섯째 자녀 이덕희는 사실 병철의 혼외자라고 합니다.
게다가, 병철에게는 일본인 아내가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1남 1녀의 자녀가 태어났기 때문에
병철에게는 총 10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첫째이자 장녀였던 이인희에게는 종이 사업을 하던 전주제지와 고려병원이 상속됩니다.
인희는 1979년에 호텔신라의 상임 이사로 취임, 
1983년에는 전주제지 고문이 되어 삼성그룹의 제지 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전주제지를 상속받은 뒤, 1991년에 삼성그룹으로부터 독립하여
한국의 소나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한솔로 이름을 바꾸며 지금의 한솔제지가 됩니다.

고려병원은 지금의 강북삼성병원입니다. 
장남인 이맹희에게는 제일제당과 안국화재의 주식이 분할됩니다.
당시 건희가 가지고 있던 제일제당의 지분이 있었는데, 
제일제당을 삼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 위해
맹희의 안국화재 주식과 건희의 제일제당 주식을 맞교환하게 됩니다. 

그렇게 1993년,
삼성에서 독립한 제일제당이 지금의 CJ그룹입니다. 
셋째이자 차남인 이창희는 사망 이후에 재산 분할이 진행됐기 때문에
직물, 화학사업을 하던 제일합섬이 창희가 설립했던 
새한미디어에 편입되며 창희의 아내와 자녀에게 분할되었습니다.

LG가로 시집간 넷째이나 둘째 딸인 이숙희는 병철의 
뜻에 따라 상속에서 완전히 배제됐다고 합니다.
숙희에게 재산을 상속하면 경쟁회사에 재산을 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이자 3녀인 이순희에게는
재산분할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별다른 몫이 주어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병철의 자녀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자녀에 속합니다.
그러던 2005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는 3개월간 위장계열사 자진신고를 실시합니다.

이때 충남 아산에 있던 한 휴대폰 부품 및 액세서리 업체가 자진 신고하며 계열분리를 신청했습니다.
바로 이순희의 아들, 김상용이 1998년에 설립한 영보엔지니어링이었습니다.
영보엔지니어링은 설립 15년 만에 매출 4000억 원을 기록하며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영보엔지니어링의 매출의 90% 정도가 삼성전자와의 거래에서 발생해서
친족 기업 일감 몰아주기 의심사례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알머스라고 사명을 바꿔서 운영 중입니다.
여섯째이자 4녀인 이덕희는 혼외자였기 때문에 재산분할에서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일곱째이자 3남이던 건희는 삼성물산, 삼성전자, 삼성반도체통신, 제일모직, 
중앙일보, 동방생명을 모두 물려받으며 삼성그룹 제2대 회장이 됩니다. 

여덟째이자 5녀인 이명희에게는 신세계 백화점이 주어졌습니다.
일본인 아내에게서 낳은 자녀 이태휘와 이혜자에게도 역시 재산은 분할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삼성가의 재산분할을 그렇게 잘 마무리되는 듯했습니다. 

한편, 1988년 5월
건희는 대표 상속인으로 상속재산은 237억 2300만 원, 
상속세는 150억 1800만 원으로 신고했습니다.
국내 1위 재벌 총수의 상속세 치고는 너무 적은 액수에 다들 의심을 품었습니다. 

얼마 후 국세청이 추가로 조사하여 누락된 신고분을 찾아내고
최종적으로 176억 원의 상속세가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액수도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던 2007년 10월 29일, 삼성그룹 법무팀장 출신이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에 대한 양심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2008년에는 삼성특검 수사를 통해 병철의 차명재산이 공개되며 
무려 4조 5천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차명재산에 대한 상속문제를 제기하며 
장남 맹희가 7,100억 원, LG가로 시집간 2녀 숙희가 1,900억 원,
총 9,000억 원의 상속분 요구 청구 소송을 하게 됩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과거 재산 상속 과정에서 이미 끝났다고 인정했습니다.
맹희와 숙희의 차명 재산에 대한 상속 법정 공방은 2014년까지 계속되는데,
이 과정에서 장남 이맹희는 "건희는 늘 자기 욕심을 챙겨 왔습니다.

한 푼도 안 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한 겁니다."
라고 했으며, 이에 건희는 "감히 날 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요.
바로 내 얼굴을 못 보단 양반이라고" 라며 서로 디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2014년, 상속 주식에 대한 권리 행사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이건희가 승소하며 마무리됩니다. 

 


24. 이건희와 진돗개

건희가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기, 낯선 나라에서 
외롭던 건희에게 친구 하나가 생깁니다.
집에서 페키니즈 한 마리를 기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일본에서 길렀던 페키니즈가 첫사랑이라 고백하며
사람과 동물 간에 심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일본에서 시작된 건희의 개에 대한 애정은
훗날, 국견인 진돗개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도록 만들었습니다. 
사실 1962년 12월 3일,
진돗개는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며 한국의 순종견임을 밝혔지만,
세계 견종 협회는 진돗개의 순종 여부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순종견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셰퍼드 새끼 한 마리가 당시 10~15만 원 정도 할 때, 
진돗개 새끼는 5,000~6,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1969년, 건희는 진돗개를 세계 견종 협회에 등록하기로 
마음먹고는 직접 진도로 내려가 3일 동안 순종 진돗개가 있다는 
집을 돌아다니며 총 30마리의 진돗개를 사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순종인지를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후 사육사와 외국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며 연구한 결과,
개체가 150마리로 늘어났을 때쯤 확실한 순종 한 쌍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1979년,
이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세계 견종 협회에 데리고 가서 
한국의 순종견이라는 것을 등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돗개 마니아이긴 했지만 건희는 소형견을 더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1986년, 건희는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를 키우게 됩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벤지, 벤지는 요크셔테리어치고는 꽤 얌전했다고 하는데,
건희가 가장 사랑했던 개였습니다. 
하지만 10년의 시간이 흘러 벤지는 나이가 들어 죽게 됩니다.
그러자 건희는 수컷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입양하여 벤지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포메라니안 벤지 역시 건희와 함께 오랜 기간 함께 살다 2009년 나이가 들어 죽었는데,
2010년, 죽은 포메라니안 벤지의 체세포를 배양해 복제견 벤지 2호, 벤지 3호가 태어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길러지다 일반인에게 분양되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또 한 마리의 벤지가 복제되어 벤지 4호가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건희의 개에 대한 애정은 삼성의 사업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992년, 애버랜드에 국제화 기획실을 만들어
진돗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2005년 5월,
진돗개는 영국 이견단체 켄넬 클럽에서 인정한 197번째 명견으로 등록됩니다. 
1993년 8월에는 삼성화재에 안내견학교를 설립하여
매년 10~12마리 정도의 안내견을 훈련시켜 시각장애인에게 
무상으로 분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1993년 미국의 종합경제지 포춘과 인터뷰 속 고 이건희 선대회장과 반려견 벤지 출처-삼성전자
1993년 미국의 종합경제지 포춘과 인터뷰 속 고 이건희 선대회장과 반려견 벤지 출처-삼성전자


25. 삼성과 모바일 사업(휴대폰)

반도체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모바일입니다. 
1983년, 미국의 전자 통신 제품 업체, 모토로라에서는
세계 최초의 휴대폰, 다이나택 8000X(DynaTAC 8000X)가 출시됩니다. 
모토로라에 대해서는 다른 영상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아무튼 삼성은 이때부터 모바일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4년,
삼성전자는 국내 최초 이동통신 서비스인 카폰을 출시했습니다. 
카폰은 말 그대로 차량에 설치해서 이용할 수 있는 통신장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습니다. 

출시 당시 카폰의 가격은 가입비와 단말기 가격 포함 400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이는 당시 347만 원 정도 하던 자동차, 포니 2보다도 비싼 가격이었던 겁니다. 
한편, 같은 해에 한국전기통신공사 지금의 KT는
카폰과 같은 무선통신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한 자회사를 설립합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식회사, 바로 지금의 SK텔레콤입니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이동통신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삼성전자는 88 서울 올림픽에 맞춰서
국내에서 생산한 최초의 휴대폰인 SH-100을 출시했습니다. 
SH-100은 무게가 800g 정도로 아주 크고 묵직해서
'냉장고 폰', '벽돌폰' 등의 별칭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일 년에 2,000대 이상 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1984년에 2,658명뿐이었으며
1991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10만 명을 돌파하게 됩니다. 
1991년, 삼성은 도시바에서 제조한 휴대폰에
삼성 로고를 넣어 출시하는 OEM방식으로 SH-500과 SH-600을 출시했습니다. 

기존 제품의 절반 크기라는 점을 어필하며 마케팅했지만,
모토로라가 국내 모바일 시장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의 휴대폰은 해외시장은커녕,
국내시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1993년, 비록 삼성 모바일은 여전히 실적이 저조했지만,
텔레비전 등의 다른 제품들은 국내에서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LA 출장 중이던 건희에게 깜짝 놀랄 일이 생기게 됩니다.

삼성의 텔레비전이 전자 제품 매장 구석에 처박혀서 
먼지가 잔뜩 쌓인 채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1993년 6월 4일에는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으로 있었던 일본인, 
후쿠다 다미오가 사표를 제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후쿠다 다미오는 1989년에 건희가 직접 스카우트한 인물이었는데,
그만두기 전에 지난 4년간 삼성에 있으면서 느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이것을 일명 후쿠다 보고서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에는 삼성 임직원들이
공업디자인과 상품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디자인 영역의 문제를 다룬 보고서였습니다.
당시 도쿄에 있었던 건희는 이 보고서를 가지고 임원들과 밤샘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다음 날, 건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갈 일이 있어 공항으로 향하게 되는데, 
삼성 사내방송팀 SBC에서 제작한 '고발 프로그램' 테이프 하나가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본 건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라인을 촬영한 30분짜리 영상이었는데,
플라스틱 뚜껑이 불량으로 생산되어 뚜껑이 잘 닫히지 
않자 칼로 접촉면을 깎아내어 조립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건희는 잔뜩 화가 나서는 서울의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200여 명의 삼성 핵심 경영진을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했습니다.


그렇게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비상경영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날 건희는 회의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이것을 프랑크푸르트 선언, 또는 신경영 선언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불량이 생긴 생산라인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을 중단시키는 '라인 스톱제'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건희는 
삼성전자 C&C 상무였던 오정환에게 모토로라가 90%를 점유하고 
있는 국내 시장에서 삼성이 3년 내에 50%를 넘을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때 정환은 차마 못 한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때 정환의 주도 하에 모토로라를 따라잡기 위한 
삼성의 새로운 모바일 브랜드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브랜드의 이름을 짓기 위해 내부적으로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정환이 낸 아이디어가 선정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결정된 이름은 애니콜(Anycall)이 아닌 애니텔(Anytell), 
사실 정환은 신문을 보다가 '애니깽'이란 영화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통화가 잘 된다'는 의미로 애니텔과 애니콜이 모두 떠올랐다고 합니다.
정환은 애니콜이 좀 더 마음에 들긴 했지만, 콜걸(Call girl)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반대에 부딪혀
애니텔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앤텔(Antel)이란 유사상표가 이미 존재한다는 이유로
애니텔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정환은 애니콜로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새로운 브랜드의 명칭은 애니콜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94년 10월, 애니콜 최초의 제품, 애니콜 SH-770이 출시됩니다.
무게 187g, 사용시간 최대 32시간, 가격은 95만 원으로 나온 SH-770
사실 삼성은 어떻게 하면 모토로라와 차별화할 수 있을까 연구하던 과정에서
소비자들이 휴대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통화 성공률(통화품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삼성은 국토의 70%가 산인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을 내세우며 
한국 지형에서도 잘 터진다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애니콜의 등장 이후 국내 휴대전화 점유율이 30%까지 높아지긴 했지만,
실제로 삼성 휴대폰을 구매한 소비자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신경영 선언을 하며 계속해서 품질관리를 강조해 온 건희는
휴대폰의 불량률이 11.8%에 달한다는 보고까지 받게 됩니다.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파는 것은 고객들을 기만하는 것이야!"
그리고 1995년 3월 9일, 건희의 지시에 따라 삼성전자의 구미 사업장에서
휴대폰과 무선전화기, 팩시밀리 등 시중에 출시된 삼성 제품 15만 대를 
모두 회수해서 태워버린 일명 애니콜 화형식이 거행됩니다.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보며
삼성 직원들은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고 합니다. 
당시 불에 탄 제품은 500억 원어치 상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니콜 화형식을 한 지 4개월 만에 애니콜의 판매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신규 고객 개통수 1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국내 휴대폰 점유율 50%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렇게 국내 시장에서 모토로라를 이긴 삼성은
점차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5G 이동통신까지 발전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1세대 이동통신, 1G를 사용했습니다.
참고로 1G는 1 Generation의 약자입니다. 
1G는 아날로그 방식이었기 때문에 주파수 변조 방식을 통해 음성통화만 가능했습니다.
또한 아날로그 주파수 방식이었기 때문에 혼선과 잡음도 많았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이동통신의 표준으로 사용하던 방식은
유럽에서 개발한 GSM이란 방식이었습니다. GSM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TDMA, Time Division Multiple Access란 기술을 고안했습니다. 이 기술은 사용하는 시간을 분할하여
여러 사람이 동시에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도록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편 1989년,
미국의 스타트업 회사 퀼컴은 최초로 CDMA라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통화 시험에 성공합니다.
CDMA는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라는 약자로 코드를 이용하여 동일한 주파수에 
다중의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GSM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퀄컴사와 CDMA 기술 공동 개발을 하게 되면서
1995년, 세계 최초로 CDMA 기술의 상용화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CDMA 기초 기술의 습득하여
CDMA 단말기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1996년, 세계 최초의 
CDMA 단말기 SCH-100이 출시됩니다.


이로써 이동통신은 1G에서 2G 시대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1997년에는 세계 최소 최경량 휴대폰, 플립형 제품은 SCH-200F가 출시됩니다.
이후 삼성은 계속해서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점을 내세우는 
동시에 새로운 부가기능을 강조하여 광고했습니다.


음성자동다이얼은 그 당시 최신 기능이었습니다. 
한편 1996년,
모로토라는 세계 최초 폴더형 휴대폰 스타텍을 출시하며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삼성전자도 이어서 1998년에 폴더형으로 디자인된 SCH-800이 출시되지만,
IMF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별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작된 SCH-800의 회로 기판에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신제품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개발 직원이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9년, SPH-A1000, 일명 깍두기폰이라 불리는 제품이 출시됩니다.
당시 애니콜 전속 모델은 학교 1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장혁이었습니다. 
어쨌든 SPH-A1000은 작은 사이즈와 세련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으며
큰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진 휴대폰들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에는 세계 최초의 MP3폰인 SPH-M2500과
세계 최초 손목시계형 휴대폰은 SPH-WP10, 그리고 세계 최초 TV 폰인 SCH-M220,
2000년에는 세계 최초로 카메라를 내장한 CDMA 휴대폰, SCH-V200과
생리주기 등 여성에게 필요한 기능을 담아 만든 세계 최초 여성 전용 폰, 
SPH-A4000, 일명 드라마폰이 출시됩니다.


2001년에는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폴더가 열리고 닫히는 
세계 최초 전자동식 폴더폰, SPH-A5000이 출시되었습니다.
또한 2001년부터는 동시에 송출할 수 있는 휴대폰 사운드 기술이 
개발되며 단음에서 벗어나 4개의 음을 낼 수 있는 4 poly 폰부터 시작하여
16 poly, 40 poly, 64 poly, 128 poly 순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2002년부터는 휴대폰 화면이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가기 시작하는데,
삼성전자에서는 세계 최초 TFT-LCD 컬러 휴대폰인 SGH-T100이 출시됩니다.
이 휴대폰은 삼성전자 최초의 1000만 대 이상 판매된 제품이 됩니다. 
또한 같은 해에 세계 최초로 영상 녹화 및 재생이 가능한 휴대폰,
SCH-V300이 출시됐습니다. 

2003년에는 세계 최초로 안테나를 내장형으로 바꾼 SGH-E700이 출시됩니다.


노르웨이의 최대 일간지 아르텐포스텐에서 이 휴대폰을 극찬하며 
휴대폰 계의 메르세데스 벤츠라고 하여 '벤츠폰'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2004년에는 세계 최초로 화면을 가로로 회전시킬 수 있는 휴대폰, 
SGH-V500, 일명 가로본능폰이 출시되며 DMB 방송 시청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세계 최초 글로벌 로밍이 가능한 휴대폰,

SCH-A790 일명 월드폰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시기부터는 폴더폰에서 화면을 밀어 올리는 

슬라이드폰으로 유행이 전환되는데
삼성전자는 블루-블랙 색상의 디자인으로 만든 슬라이드폰, 

SGH-D500 일명 블루블랙폰을 출시합니다.
그리고 이 폰 역시 1,000만 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한편, 이동통신 기술은 음성과 문자 메시지 정도만 가능했던 2G에서
이미지, 영상 등 고속 데이터 통신이 가능한 3G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G의 발전은 본격적인 스마트폰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삼성은 풀터치스크린 방식의 햅틱 시리즈와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세계 최초로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AM OLED,
일명 아몰레드를 휴대폰에 탑재하며 매출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3G 시대에 적응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2008년, 무섭게 3G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애플의 아이폰 3G였습니다.
아이폰은 애플 자체적으로 개발한 OS, iOS를 탑재하여 출시되는데
이후 아이폰3G가 국내 시장에 풀리면서 '우와! 이것이 스마트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아이폰에 맞서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모바일을 OS로 탑재한 스마트폰 옴니아를
2009년 10월에는 역시 윈도우 모바일을 탑재한 옴니아 2를 출시했습니다. 


피겨여왕 김연아까지 투입하여 마케팅했지만,
느리고 몇 개 없는 앱 등 총체적인 문제를 드러내며 

심지어 옴레기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어쨌든 옴니아 시리즈는 말 그대로 완전 폭망이었습니다. 
한편 구글에서 개발된 OS가 있었으니, 바로 안드로이드
2008년 10월 21일, 구글은 안드로이드의 오픈소스 선언을 하게 됩니다. 
삼성전자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OS를 기반으로
새로운 스마트폰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마저 포기하면서
새로운 스마트폰 브랜드, 갤럭시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갤럭시라는 이름은 은하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제품이 되길 기대하며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삼성 최초의 안드로이드폰 갤럭시 A에 이어 갤럭시 S가 출시되는데,
갤럭시 S는 약 2,500만 대를 팔아 내면서 아이폰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애플은 9.7인치 화면의 iPad 1세대를 출시하며
태블릿 PC 시장에 먼저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삼성은 차별화 전략으로 7인치 화면의 태블릿 PC 갤럭시 탭을 출시했습니다.
2011년에는 1.2 GHz 듀얼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하고 
슬림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갤럭시 S2가 출시되는데
갤럭시 S2는 무서운 속도로 판매되기 시작하더니 스마트폰 시장에서 
독주하고 있던 아이폰을 따라잡아 버리게 됩니다.


한편, 아이폰이 3.5인치 화면을 고집하던 상황에서 삼성은 
오히려 화면 크기를 5인치 이상으로 키우며 펜을 이용하여 스마트폰의 
기능을 확장시킨 갤럭시 노트 시리즈를 출시하기 시작합니다. 


2011년 경,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스마트폰 등의 데이터 전송량을 감당하기 위해 
3G에서 더욱 개선한 Long Term Evolution, LTE 서비스가 시작되며
3G와 4G가 혼재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2012년에는 엑시노스 2 쿼드코어 프로세스를 탑재한 갤럭시 S3가 출시되는데,
출시 50일 만에 1,000만 대, 7개월 만에 4,000만 대 이상 판매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2013년엔 출시된 갤럭시 S4는 한 달 만에 1,000만 대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갤럭시 S4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기능은 'S뷰 커버'였습니다.


S뷰 커버는 상단에 투명한 창이 있었는데, 휴대폰을 덮으면 
그 위치에 날짜와 시간, 배터리 잔량 등
커버를 열지 않고도 주요 정보의 확인이 가능했으며 전화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014년에 출시된 갤럭시 S5는 방수, 방진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지문인식 솔루션을 내장한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심장 박동 인식 센서가 있어서 심장 박동과 스트레스 지수 등을 계싼해주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2015년에는 갤럭시 S6가 출시됩니다. 

이때부터 삼성 스마트폰은 배터리 교환 방식에서 배터리 내장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무선 충전 솔루션을 탑재하게 됩니다. 
또한 갤럭시 노트 엣지에 처음 탑재하기 시작한 엣지 디스플레이를
갤럭시 S6에 탑재한 갤럭시 S6 엣지도 출시되는데, 신용카드 대신 
스마트폰을 터치하여 결제할 수 있는 삼성페이가
갤럭시 S6 엣지에 처음으로 지원되며 상용화를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는 갤럭시 S6 때와 같이 플랫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갤럭시 S7과
엣지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갤럭시 S7 엣지, 이렇게 두 가지 모델로 출시됩니다. 
한편 2016년 8월 19일,
갤럭시 시리즈 최초로 홍채 인식 보안 기술로 탑재하여 주목받았던 갤럭시 노트7
그런데, 출시된 지 5일 만에 충전 중 휴대폰이 폭발했다는 커뮤니티 글이 올라옵니다.


게다가 며칠 뒤, 미국의 한 사용자가 갤럭시 노트7에 불이 붙었다는 유튜브 영상을 올렸습니다.
2016년 9월 2일에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 결함을 인정하며 
100만 대 중 24대가 불량인 수준이라며 판매를 중단하고
구입 시기와 상관없이 갤럭시 노트7 신제품으로 교환해 주겠다며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전 세계적으로 폭발 사고가 발생하자,
2016년 9월 10일, 삼성전자는 갤럭시 노트7 사용자들에게 사용 중지를 공식 요청했습니다.


이후 폭발 원인이 배터리 때문이라고 밝히며 갤럭시 노트7의 배터리 업체를 바꾸게 되는데
배터리가 교체된 갤럭시 노트7도 폭발했다는 소식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결국 2016년 10월 10일,
미국의 이동통신사들은 갤럭시 노트7의 판매 중단을 선언했고 다음날, 
삼성전자는 갤럭시 노트7 생산 중단을 발표하며
갤럭시 노트7은 단종됩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는 7조 원가량의 손해를 

입었을 것이라 추정되는데, 이를 두고 '제2의 화형식'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2017년에 출시된 갤럭시 S8부터는
플랫 디스플레이 버전이 사라지고 5.8인치 버전인 갤럭시 S8과 6.2인치 
버전인 갤럭시 S8+로 출시되기 시작합니다.
이 모델부터 인공지능 비서 기술인 빅스비가 지원되며
홍재인식보안기술 역시 탑재되었습니다. 


2018년에도 크기에 차이를 둔 갤럭시 S9과 갤럭시 S9+가 출시됩니다.
이중 갤럭시 S9+에는 후면에 듀얼 카메라가 탑재되긴 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갤럭시 S8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2019년에는 갤럭시 S9에 비해 디스플레이, 카메라, 배터리 등 주요 스펙을 
많이 개선시킨 갤럭시 S10이 출시됩니다.
카메라 사양이 높아졌으며 후면 카메라도 트리플 렌즈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전면 카메라 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화면으로 채운
인피니티-O 디스플레이를 탑재했습니다. 


한편 출시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기대를 모든 제품이 있었으니
디스플레이가 접히는 스마트폰, 갤럭시 폴드였습니다. 
화면을 접으면 화면에 문제가 생기지 않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삼성은 20만 번 이상 접었다 펴도 문제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2019년 9월, 갤럭시 폴드가 한국을 시작으로 출시되었고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소비자들이 자체적으로 갤럭시 폴드의 내구성을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IT 매체 씨넷에서는 폴딩봇을 이용하여 갤럭시 폴드를 
접었다 폈다 하는 실험을 생중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폴딩 12만 번 정도에서 화면 이상이 생겼던 겁니다. 


하지만 이 실험 이후 갤럭시 폴드는 오히려 내구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실험을 진행하던 폴딩봇이 119,357번째 때 고장이 나기도 했음
실험 환경이 실제 사용하며 화면을 접는 것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기술이 이렇게 발전해 오는 가운데
이동통신 기술도 계속해서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LTE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2GB의 영상을 1초 만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5G 이동통신이 개발된 것입니다. 물론 아직 상용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5G 기술을 통해 가상현실, 자율 주행,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서비스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삼성은 갤럭시 S10의 후속으로 갤럭시 S20을 출시했으며
갤럭시 Z 폴드에 이에 최근에는 S24도 출시됏습니다.

 


26. 삼성과 자동차

미국 유학시절, 건희의 최고 관심사였던 자동차!
그래서 1980년 후반부터 건희는 비서실에 
자동차 사업 진출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1993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이 당선되었습니다.
삼성의 자동차 사업 얘기를 처음 들은 김영삼 대통령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상공자원부, 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는 과잉 중복 투자를 막기 위해
재벌그룹마다 3~4개 업종으로 재편할 것을 요구하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분명 그런 상황이었는데...
1994년 11월이 되자, 김영삼 정부는 돌연 삼성자동차 설립을 허용하게 됩니다.
명분은 삼성자동차가 국가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막에는 여러 로비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원래는 경남 진해나 충남 당진에 자동차 공장 부지를 계획했었지만,
삼성자동차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한 전략으로 갯벌을 
매워 지반이 약해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지만
땅값은 더 비쌌던 부산 신호공단으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삼성은 자동차 사업 진출 허가를 받게 됩니다. 

결국 1995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 제휴를 맺는 방식으로 삼성자동차가 설립됩니다. 
건희는 삼성자동차 임원들에게 가장 좋은 차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부터 너무 과도하게 시설에 투자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아무튼 삼성자동차는 닛산으로부터 자동차 공장 설비와 부품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3월,
삼성자동차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중형차가 바로 SM5입니다. 
그런데, 삼성자동차는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무리하게 초기 투자를 한 데다가 자동차 사업 특성상 초기 수익성이 
낮았던 상황에서 외환위기까지 겪으며
결국 1999년,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 신청을 하게 됩니다. 

이후 2000년,
삼성카드와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르노가 합작으로 르노삼성자동차를 
설립하게 되고 삼성자동차 승용차 부문을 인수했습니다.
르노는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면서 국내 
매출액의 0.8%를 로열티로 삼성에 지불해 왔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삼성이라는 이름을 떼어 버리고 르노자동차로 변경이 되었습니다.


27. 삼성과 외환위기

1997년 1월, 당시 재계 순위 14위였던 한보 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여러 크고 작은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부는 IMF 국제통화기금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 시기를 IMF 외환위기라 부릅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임직원들의 급여를 삭감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앞에서 삼성 역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6년 당시, 삼성은 글로벌 제조기업 76위를 기록했지만, 
1년 사이 138위로 크게 순위가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삼성그룹 역시 구조조정위원회와 구조조정본부를 앞세워 수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삼성 구조조정위원회는 수습을 시작한 지 5일 만에 
구조조정 내용을 담은 경영체질 혁신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조직의 30% 감축, 총비용 50% 절감, 
임직원 급여 10% 삭감, 투자 규모 30% 감축 등이었습니다.

실제로 17만 명에 이르던 직원은 11만 명까지 줄었고 65개에 
이르던 계얼사를 하나하나 매각하기 시작하여 45개까지 줄였습니다.
이때, 삼성중공업 창원 1 공장, 창원 2 공장을 볼보에 매각했으며 
삼성물산에서 만든 대형마트 홈플러스의 경영권도
영국 최대 유통기업인 테스코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삼성전자 중심의 제조업과 
삼성생명 중심의 금융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건희는 "해서는 안 되는 사업, 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은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한편, 삼성그룹의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가운데 경영권 
승계를 위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28. 삼성의 3대 회장 이재용

1967년 4월 30일, 이건희와 홍라희는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14개월 정도 지난 1968년 6월 23일,
이들 사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이재용, 지금의 삼성전자 회장이 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유년기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도 거의 없지만, 동양방송 이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방송국에 가서 찍힌 사진에서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재용은 서울 3대 사립초등학교라 불리는 경기초등학교와 
많은 대기업 자재들이 거쳐간 청운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재용과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재용이 
삼성가라는 티를 내지 않는 모범생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게다가 재용은 성적도 꽤 좋은 편이었고, 중, 고등학교 때는 
반장을 맡기도 했으며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명랑, 쾌활하며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1987년, 재용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왜 동양사학과에 들어갔냐에 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뭐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어쨌든 대학생활 중에도 그는 조용히 학업에만 열중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재용은 승마에 입문했었는데,
1989년에 제2회 아시아승마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 정도로 운동 신경이 뛰어난 재용은 1990년 6월에 
받은 징병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1991년 11월에 재검사를 받더니 허리디스크로 
인해 5급 판정을 받으며 면제를 받게 됩니다.

재용은 승마 국가대표 선수를 하면서 말에서 자주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고 했는데, 
91년 당시, CT 장비가 없던 산부인과 전문병원인 안세병원에서
허리디스크 진단서를 떼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안세병원은 1999년에 척추 전문 병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어쨌든 재용은 1992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한편 졸업 직전인 1991년 12월,
재용은 삼성전자 공채 32기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입사원으로 회사 생활을 하기도 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재용이 공채로 입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총무그룹 부장으로 입사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암튼 그렇게 일본 게이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지내며 
1995년, '일본 제조업 산업공동화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미국 유학 시절에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 임세령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2009년 협의이혼을 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많은 IT 벤처 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사업 관련 주식들이 수년간 떡상을 이어가는데
이를 IT 버블이라고 합니다. 


그러던 2000년 5월, 
재용도 하버드 경영대학원 유학생으로 있던 당시에
e삼성과 e삼성인터내셔널을 설립하며 인터넷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여기에는 재용의 개인 자산 400억 원이 들어가며
e삼성 지분 60%와 e삼성인터내셔널 지분 55%를 
확보하며 두 회사의 최대주주가 되었습니다.

e삼성은 많은 벤처 회사의 지주회사였는데 사실, 
재용의 개인 자산으로 출자한 회사라고는 하지만,
삼성그룹 차원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고 합니다. 
e삼성은 인터넷 기업을 무려 14개나 설립하며 사업을 키워갔습니다.
때문에 '이재용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3세 승계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무렵부터 IT 버블이 붕괴되며 코스피 역시 떡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e삼성과 e삼성인터내셔널은 1년 만에 176억 원의 적자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2001년, 재용은 설립 1년 만에 e삼성을 제일기획과 삼성 SDI 등
8개 계열사에 200억 원에 매각하며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재용의 첫 사업은 완벽하게 실패했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재용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후 회사로 돌아온 그는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승진하는데,
이때부터 건희는 본격적으로 재용에게 경영 수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학생 신분이던 1994년부터 1995년 사이, 
재용은 아버지 건희로부터 60억 8,000만 원을 증여받았습니다.
이때 16억 원의 증여세가 발생하고 납부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가 자발적으로 낸 마지막 증여세입니다.
어쨌든 재용은 남은 돈을 분배하여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비상장 회사였던 에스원의 주식 12만 주를 23억 원에 매입했고
이어서 삼성엔지니어링 비상장 주식 47만 주를 19억 원에 매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비상장 주식을 매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회사는 모두 증권시장에 상장되며 주가는 말 그대로 떡상! 그가 투자한 
42억 원은 단숨에 605억 원이 되어버렸습니다.

무려 563억 원의 차익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주식매매 차익에 세금이 없었기 때문에 온전한 수익이었습니다.
1996년 3월, 재용은 삼성그룹 자회사였던 제일기획의 전환사채도
1주당 만 원씩 하여 총 29만 9천 주를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3월에 제일기획은 상장되는데
상장 이후 13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며 주가가 떡상했습니다. 
재용은 이 13일째 되는 날, 제일기획의 주식을 모두 매도하여
130억 원의 시세 차액을 남겼습니다. 

한편, 1997년 3월 24일,
삼성전자는 600억 원 규모의 사모전환사채를 발행했습니다. 
사모전환사채, 여기서 전환사채란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을 의미합니다.

채권을 매수할 기회를 불특정 다수에게 주는 것을 공모 방식이라 
하며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사모 방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삼성전자 사모전환사채는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게 매각하기 위해 발행된 전환사채인 것입니다.

이렇게 발행된 600억 원어치의 사모전화사채 중 
150억 원어치를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물산이 인수했고
나머지 450억 원어치를 재용이 인수하게 됩니다. 
당시 삼성전자 주가가 5만 5천 원 정도였는데,
재용은 그보다 저렴하게 주당 5만 원에 90만 주를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9월 29일,
사모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며 그때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지분율 0.97%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1996년, 재용은 당시 중앙개발, 
삼성에버랜드의 전환사채도 매입했습니다.
중앙개발의 주식은 장외시장에서 20만 원을 호가하던 상황이었는데, 
전환사채는 고작 7,700원으로 정해지며,
96억 원어치인 125만 4천여 주가 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면 무조건 이득인 채권을 
삼성 계열사들이 자진해서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중앙개발의 전환사채는 재용이 48억 3,091만 원어치, 
서현, 부진, 윤형 세 자매가 48억 3,091만 원어치를 나눠서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재용은 이를 주식으로 전환하는데, 중앙개발 
지분의 31.9%를 확보하며 최대주주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 중앙개발이 삼성에버랜드로 사명을 변경하게 됩니다. 
이때 확보한 삼성에버랜드의 지분은
재용이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997년까지만 해도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은 삼성생명이 하고 있었으나
1998년 12월,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주식 344만 주를 
9,000원이라는 헐값에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삼성전자가 다시 에버랜드를 
지배하는 순환출자 고리 한 마디로 에버랜드만 장악하면 
삼성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구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또한 1999년, 재용은 삼성 SDS 주식을 취득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주당 7,150원의 가격으로 20.4%에 해당하는 47억 원어치를 사들였는데, 
당시 SDS 주식은 5만 4천 원 정도 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재용이 16억 세금을 내고 44억으로 시작하여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상무보가 되기 전에 마무리한 일입니다.
이후 그는 2003년에 삼성전자 상무, 2007년에 삼성전자 최고고객책임자(CCO) 겸 전무,
2009년에는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부사장, 2010년에는 삼성전자 사장,
그리고 2012년에 삼성전자 부회장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후 현재는 삼성전자 회장이 되었습니다.

 


29. 삼성 경영권 승계 비리

이재용 삼성회장 출처-네이버뉴스
이재용 삼성회장  출처-네이버뉴스

 

한편 2008년 4월,
건희는 삼성 비자금 특검 조사를 통해 차명계좌와 천억 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적발되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2009년 12월 31일, 이명박 대통령이 건희를 
단독 특별사면, 복권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2013년, 정부의 금산분리 규제가 강화되면서 
그러니까 쉽게 말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분리하게 되면서
삼성은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게다가 2014년 5월, 건희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게 됩니다.

삼성그룹 경영권의 핵심은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있었는데, 
만약에, 건희가 소유하고 있던 3% 이상의 삼성전자 지분이
사망으로 인해 자녀들에게 상속될 경우 상속세만 해도 수 조 원에 이르는 상황이었습니다.
2014년 6월, 재용이 최대주주로 있던 삼성에버랜드는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재용은 제일모직의 주식 23.2%를 가지고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15년, 삼성전자의 지분 4% 이상을 소유하고 있던 삼성물산과
재용이 최대주주로 있는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런데, 합병을 앞두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서로 다른 가치 평가를 받게 됩니다.
래미안 아파트 등 삼성그룹의 토목, 건설 사업을 담당하며 아주 잘 나가던 삼성물산은
2015년 상반기에 갑자기 영업이익이 급감했고 이는 삼성물산의 주가가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정말 매출이 좋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해외에서 
2조 원 규모의 수주를 따낸 호재를 뒤늦게 공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한편, 제일모직이 소유하고 있던 삼성에버랜드의 땅값은 
2015년에 갑자기 최고 370%까지 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제일모직은 1차적으로 가치가 올라갑니다. 

한편, 제일모직의 자회사 중에는 2011년에 설립된 바이오 CMO회사
일명 삼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있었습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설립 이후 최소 79억에서 1,407억까지
매넌 적자를 내던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던 2015년, 갑자기 1조 9,049억 원의 흑자를 기록하게 됩니다.
'뭐 기업이란 게 사업이 대박 나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흑자를 기록한 이유가 사업 대박이 아니라, 회계 기준이 변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사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지분의 91%를 소유한
삼성바이오에피스라는 자회사가 있었는데, 당시 2,900억 가치였던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바에 의해 지배력이 행사될 수 있는 종속회사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에 갑자기 에피스가 지배력은 약해지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회사로 전환됩니다.
일반적으로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전환되거나 관계회사에서 
종속회사로 전환되는 경우 새롭게 신고를 하고 가치를 재평가받게 됩니다. 
때문에 에피스는 다시 재평가를 받게 되고
에피스는 4조 8,000억 원으로 가치를 평가받으며 
여기서 어마어마한 평가 이익아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발생한 에피스의 흑자는 삼바의 흑자로 더해지고 
삼바의 흑자 덕분에 제일모직의 가치가 올라가게 됩니다.

문제는 에피스가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전환된 
이유가 정당하냐? 아니냐? 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분식회계 관련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들을 종합하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은 1대 0.35로 정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무언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제일모직 가치는 올라가고
삼성물산의 가치는 내려가서 합병비율이 3분의 1 정도가 되자 
삼성물산의 주주들은 합병 조건이 공정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7월, 삼성물산의 1대 주주였던 
바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을 하면서
결국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합병됩니다. 
이로써 삼성물산 지분이 전혀 없던 재용은
17%가 넘는 삼성물산 지분을 소유한 최대주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6년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최서원)의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정치권력이 작용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에서 개명한 최서원,
문형표 전 복지부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위원장 등 
그와 관련된 많은 이들이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거나
2심까지 유죄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병철이 세웠던 전경련에서
삼성을 포함한 재계 총수들이 탈퇴를 선언했고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미래전략실도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5월 6일,
재용은 대국민 사과를 하며, 더 이상 경영권 승계 문제로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또한 자신의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재용 역시 경영권 승계 관련 뇌물 혐의로 재판 후 3년 2개월 만에
2023년 이재용 회장의 징역 5년 구형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편과 2편을 먼저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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