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역사 1편 창업주 이병철에 이어 2편
삼성의 시련과 발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11.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12. 전경련(전국 경제인 연합회)의 탄생
13. 사카린 밀수 사건
14. 매스컴과 언론으로의 영향력 확산
15. 삼성전자의 탄생
16. 삼성의 후계자 다툼(삼성 왕자의 난)
17. 삼성의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18. 용인 에버랜드와 삼성중공업
11.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그러던 1960년 4월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통한 독재를 타도하는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했습니다.
이후 1961년 5월 16일
당시 육군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961년 5월 29일,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되는데,
그 명단의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병철이었습니다.
결국 병철을 포함한 27개 기업의 소유주들에게
378억 8백만 환이라는 추징금이 징수되었고
그중 삼성은 103억 4백만 환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환'이라는 화폐 단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원'의 10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철은 부정축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를 만나서
'지금의 세법은 전시상태 세법 그대로 적용되고 있어서
1,000 환을 벌면 1,200 환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세율 그대로 납부했다면 기업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억울함을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철은 당장에 벌금을 내는 대신 기업가들에게
투자하여 국가에 도움이 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병철의 요청은 투자명령이라는 법령으로 시행됩니다.
12. 전경련(전국 경제인 연합회)의 탄생
한편 1946년
일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경제를 다시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민간 경제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게이단렌이라는 경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병철은 이를 벤치마킹하여 1961년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라는 경제 단체를 설립하고 이곳의 초대 회장이 됩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전국경제인연합회, 전경련입니다.
13. 사카린 밀수 사건
대지주의 아들로 자라 직접 대지주가 되기도 했던 병철은 농업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해 비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비료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비료공장을 지으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으며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6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박 대통령은 병철에게 정부가 적극 지원할 테니 비료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1964년 8월 병철은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울산에 대규모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는 1년에 18만 톤을 생산하는 당시 세계 최대 비료공장이 있었고
소련에는 1년에 30만톤을 생산하는 비료공장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철은 그보다 더 큰 비료 공장을 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조율한 끝에 연 33만 톤을
생산하는 한국비료의 공장이 착공됐습니다.
그렇게 공장 건설이 80% 정도 진행될 무렵이었습니다.
1966년, 9월 15일,경향신문을 통해 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 이었습니다.
사건의 발생은 4개월 전인 1966년 5월 24일 한국비료 공장의 건설을 위해
일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건설자재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비료의 원료인 사카린 55t 정도와
양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대량 밀수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것들을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한, 일 양국 정치인들이 나눠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직접 대검에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를 지시하며
삼성과의 선긋기에 나섰고, 당시 한국 비료 상무였던
병철의 둘째 아들 창희는 구속되었습니다.
결국 1966년 9월 22일 병철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비료의
자기 지분 51%를 국가에 기부하며 재계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참고로 이 사건 때문에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두한은
국회 대정부 질의 도중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라고 외치며
똥물을 뿌린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병철의 첫째 아들 맹희는 회고록을 통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자신이 직접 현장 지휘했으며
박정희 정부와 삼성이 공모한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한국비료를 국가에 기부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1994년이 돼서야
다시 삼성이 인수하여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바꾸는데 이후 2015년,
롯데케미칼에 매각하며 지금의 롯데정밀화학이 되었습니다.
14. 매스컴과 언론으로의 영향력 확산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치며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병철은 경제인의 힘에 한계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이 될까?'하고 생각도 했지만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 바로 언론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1964년 5월 9일, 라디오 서울이 12월에는
동양텔레비전방송이 개국되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TV 상업 방송이었습니다.
1965년 9월 22일,
병철은 서울 서소문동에 10층짜리 현대식 건물, 중앙 매스컴 센터를 지은 뒤,
다른 신문사 기자 다수를 스카우트하며 새로운 신문사를 창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앙일보입니다.
이후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을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합하여 동양방송, TBC가 됩니다.
그런데,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언론을 만들고자
시작하긴 했지만 막상 사카린밀수 사건이 터졌을 때,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은 삼성에 우호적인 보도를 하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습니다.
병철은 처음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방송을
창간할 때 홍진기를 사장에 앉히고 경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1967년 4월 30일, 병철과 진기는 사돈의 연을 맺게 되는데,
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와 진기의 첫째 딸 홍라희가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12.12 사태가 일어납니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TBC를 강제로 빼앗아
KBS에 흡수시키는 언론통폐합을 추진했고
결국 1980년 11월 30일 TBC는 고별방송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후 중앙일보만 살아남아 운영되다가 1999년, 삼성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홍진기의 아드이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던 홍석현에게 인수되었습니다.
그러던 2011년 12월 1일
신문사가 종합편성채널 사업이 가능하게 되면서 개국된 채널이 바로 JTBC입니다.
한편 1968년 봄, 병철은 자신이 만든 안양골프장, 지금의
안양베네스트골프클럽에서 40년 지기 절친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당시 전자 산업으로 잘 나가고 있던 금성사의 대표, 구인회였습니다.
1956년, 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와 구인회의 셋째 아들 구자학이 결혼을 하며
이들은 사돈의 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15. 삼성전자의 탄생
1966년 9월 22일, 병철은 사카린 밀수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재계 은퇴를 선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첫째 아들 이맹회를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히게 됩니다.
갑자기 할 일이 몽땅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삼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병철은 일본을 자주 오가며 여러 산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전자 산업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병철은 삼성물산 내에
설치한 개발부를 통해 사업타당성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일본은 이미 세계적인 전자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고
대만도 전자 산업의 발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겁니다.
사실, 금성사, 지금의 LG 전자가
1959년 11월에 국내 최초 라디오를 1966년 8월엔 국내 최초
흑백 TV를 만들어 전자 산업을 이끌어가고 있었지만
그 외 다른 기업들은 해외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돈인 구인회의 사업과 겹침에도 불구하고
병철은 전자산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68년 봄, 병철은 안양골프장, 지금의 안양베네스트 골프클럽에서
구인회에게 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할 것이라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윤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
인회는 버럭 화를 내며 병철을 쏘아붙였습니다.
병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민망해하며 골프장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당시 인회의 셋째 아들 구자학은 삼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금성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구자학은 현재 아워홈의 회장입니다.
어쨌든 40년 지기 절친이자 사돈인 인회와 갈라서면서까지
전자사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은 병철은 당시 일본에서 40만 평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산요전기 공장을 견학했습니다.
그리고 산요전기 공장의 엄청난 규모에 병철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산요전기보다 더 큰 규모로 공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국으로 돌아와 수언에 45만 평, 경남 울주에 70만 평 등
총 115만 평의 땅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1월 13일,
병철은 삼성전자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경영 일선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사업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철은 일본의 산요전기와 협력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있던 기존 전자 업체들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삼성전자가 하려는 사업은 단지 산요전기의
제품을 가져와서 조립하는 것뿐이며
이는 국내산업보호를 위해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병철은 TV와 라디오를 생산하여 85%는 수출하고
단지 15%만 국내에 공급할 것이라 했지만,
기존 전자 업체들은 15%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답이 없었던 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전자 산업을 국가적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며 설득했습니다.
결국 모든 생산품을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삼성과 산요전기의 합작 투자 사업은 허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1969년 12월 4일,
삼성전자 50%, 산요전기 40%, 스미토모상사 10% 등
투자금 5,000만 달러 규모로 삼성산요전기가 설립되었습니다.
삼성이 출시한 초기 제품들은 선풍기 목이 쉽게 부러지는 등 불량률이
높아서 상당 기간 적자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차츰차츰 생산 시스템과 전자기술이 축적되면서 삼성전자는
자체 기술로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973년 4월, 삼성전자는 첫 번째 자체 제작 제품을 출시하게 됩니다.
19인치 트랜지스터 흑백 TV, 마하 506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부터 삼성에서 생산된 TV는 국내 판매가 가능해지며
삼성전자의 매출은 조금씩 증가했습니다.
그러던 1975년 4월, 선풍적 인기를 끈 초대박 상품이 등장합니다.
바로 흑백 이코노 TV, 지금까지의 TV는 전원을 켜면 브라운관의
전차총이 20초 정도 예열을 한 뒤 켜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이코노 TV는 5초 만에 켜졌던 겁니다.
덕분에 1978년에 이르러
이코노 TV는 연간 판매량 74만 6000대를 기록하며 시장점유율을
40.9%까지 끌어올리며 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자 산업에 기반을 잡게 된 삼성전자는 이 시기부터
LG전자와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16. 삼성의 후계자 다툼(삼성 왕자의 난)
이병철과 박두을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 이맹희, 둘째 아들 이창희, 그리고 셋째 아들 이건희
그중 맹희와 창희는 아버지를 도와 삼성 계열사의 경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카린 밀수 사건의 결과로 병철은 은퇴를 선언하고
첫째 아들 맹희에게 삼성 계열사 일부의 경영을 맡겼습니다.
사실, 병철은 삼성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당연히 맏이인 맹희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가까이 두고
10년 정도 후계자 수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맹희가 경영을 맡은 지 6개월도 안 돼서
맡은 기업체뿐 아니라 삼성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평소 '실패한 경영인은 범죄자'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병철은
삼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직원들을 생각하며 맹회는
삼성그룹을 경영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편, 둘째 아들 창회는 당시 한국 비료의 상무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하고
창희는 그 책임을 지고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리고 6개월간 복역한 뒤,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의 부사장직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뿐
아버지인 병철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1969년, 병철은 삼성전자의 설립과 함께 다시 경영 일선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둘째 아들 창희는 아버지의 복귀가 못마땅했는지
사카린 밀수와 탈세, 외화 밀반출 등 삼성의 조직적인 경제 범죄에
아버지 병철이 직접 개입되었다는 내용의 투서를 쓰게 됩니다.
이 투서는 당시 육군 중령이던 전두환이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에게 전달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아버지만 없으면 자신이 삼성을 물려받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삼성그룹 '왕자의 난'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투서를 받은 박 대통령은
"자식이 아버지를 모함하고 고발한다는 것은"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야."
"이 사건, 묵살해!"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결국 청와대 투서 사건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사건 이후, 계획에 실패한 창희는
삼성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되며 왕자의 난은 끝이 납니다.
17. 삼성의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그런데, 병철은 이 사건에 첫째 아들 맹희 또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서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던 전두환과 맹희가 친한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맹희와 창희는 모두 후계자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병철은 미리 유언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장남 맹희는 경영에 뜻이 없고,
차남 창희는 많은 기업을 하기 싫어한다.
3남 건희는 처음에 사양하다가 맡아보겠다는 뜻을 가졌다.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기록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병철이 죽은 뒤, 유언장은 없으며 자녀 5명 앞에서
구두로만 유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며
상속과 관련한 법정 공방이 벌어지게 됩니다.
한편, 둘째 아들 창희는 삼성그룹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
개인사업을 시작하며 비디오테이프, 오디오 테이프 사업 등을 하던
새한미디어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다 1977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와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91년, 창희는 혈액암에 걸려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장남 이맹희 또한 2015년 사망하게 되며 '비운의 황태자'라 불리게 됩니다.
18. 용인 에버랜드와 삼성중공업
각종 사업을 하고 있던 병철은 평소에 해외를 자주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가 꼭 보게 되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헐벗은 우리나라의 산지였습니다.
국토의 60% 정도가 산지로 되어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군수물자와 연료용으로 나무를
다 베어버려 산림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병철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삼성의 경영 일선에 물러난 병철은
산을 가꾸어보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1968년, 병철의 농원 조성사업은 국토개발의 시범사업으로 선정되며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갔습니다.
토질, 강우량, 온습도 등을 검토하여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는
경기도 용인군 포목면에 있던 450만 평 규모의
야산에다가 농원을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그 야산을 2천 명이 넘는 소유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설득하며 사들였다고 합니다.
1971년부터 다양한 종의 묘목을 심기 시작했고 나무에
필요한 퇴비 생산을 위해 돼지 600두를 수입해 왔습니다.
농원 조성에 필요한 물을 위해서 5만 평 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어 잉어와 붕어 등 양어를 하는 동시에 낚시터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동물들도 데려와 동물원도 세팅했는데,
국내최초로 사자 사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1976년 4월 18일, 국내 최초
가족놀이동산, 용인자연농원이 개장되었습니다.
1985년, 국내 꽃 축제의 효시라 불리는 장미 축제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리다 1996년, 용인자연농원은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용인 에버랜드입니다.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기초를 다진 병철은
어느샌가 또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경공업 계열의 산업을 해오고 있었지만,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일본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중화학 분야,
바로 조선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항상 세계 최대 규모를 외쳤던 병철은 이번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73년 5월, 선진 기술의 도입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사 IHI를 찾아갔습니다.
이후 IHI와 삼성이 각각 50%씩 투자하여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기 위해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150만 평의 부지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원유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며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1차 오일쇼크라 부릅니다.
1차 오일쇼크는 전 세계 신규선박의 발주를 몽땅 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미 계약했던 것들도 계약금을 포기하며 취소했습니다.
결국 병철도 통영의 안정리조선소 착공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경남 죽도에는 한창 공사를 진행하다가 오일쇼크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중형조선소, 우진조선이 있었습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이 조선소를 살리기 위해 박정희 정부와
은행은 삼성에게 인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조선소는 병철이 생각했던 세계 최대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77년 4월, 정부의 강한 요청으로 인해 삼성은 조선소를 인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9월, 최대 6만 5천 톤의 건조 능력을 갖춘 첫 번째 도크가 완공되며
선박건조를 시작했습니다.
이 조선소는 비록 병철이 의도치 않게 떠맡은 조선소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조선소 중 하나가 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입니다.
한편, IHI와 합작으로 진행하려던 조선소 사업 계획이
틀어지면서 기계공업으로 사업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창원 2공장입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창원1공장, 창원 2공장은 볼보에 매각되어 현재는 볼보그룹의 소유가 됩니다.
1편과 3편을 읽어보세요~
-삼성의 역사 1편: 창업주 호암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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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역사 3편: 이건희와 삼성의 새로운 사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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