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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경제

삼성의 역사 1편: 창업주 호암 이병철

by 아침에커피넉잔 2024. 4. 12.

 

삼성은 현제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기업이지만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닐 거라는 말로도
설명이 되는 거대한 기업입니다.
이런 기업이 성장하는데 100년도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면
외국에서는 신기하게도 바라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런 삼성이 대한민국 정계 1위의 그룹으로 발전되었던
과정과 역사를 여러편으로 나눠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삼성의 역사 1편,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썸네일

 

목차

1. 이병철의 어린시절
2. 이병철의 학창시절
3. 이병철의 방황
4. 이병철의 사업시작
5. 이병철의 파산과 재도전
6. 삼성의 2대 회장 이건희의 탄생
7. 삼성상회와 조선양조, 삼성물산공사
8. 한국전쟁
9. 제일제당 창업
10. 제일모직 창업

 


1. 이병철의 어린시절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는 아주 넓은 농토를 소유한 대지주 이찬우와 
그의 아내 권재림이 2남 1녀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찬우의 가족이 살던 이 집은 찬우의 할아버지 이홍석이 지은 집이었는데
무려 570펴의 넓은 땅에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 
멋들어진 기와집으로 지어진 대저택이었습니다.
그러던 1910년 2월 12일, 이들 부부 사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대한민국 경영계에 큰 획을 그으며 
삼성 그룹의 초대 회장이 되는 호암 이병철입니다.

참고로 병철이 태어난 이 집은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에 
해당하는 명당 중 명당일 뿐 아니라 부자의 기가 흐른다고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부자 기 받기를 하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병철이 태어난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에 의해 
국권이 상실된 경술국치가 일어납니다.
시대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병철의 아버지, 
찬우는 아주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엄청난 양의 쌀을 수확하는 천석지기였기 때문에 
병철은 어려서부터 아주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병철은 6살부터 할아버지가 세운 문산정이라는 서당을 다녔습니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댕기를 땋은 전형적인 학도의 모습으로 천자문과 사서삼경
그러니까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시경, 상서, 주역을 배웠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논어를 가장 즐겨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철은 어릴 적에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배우는 기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왼쪽)과 이건희 2대 회장 출처-아시아투데이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왼쪽)과 이건희 2대 회장 출처-아시아투데이


2. 이병철의 학창 시절

그러다 1921년, 12살이 된 병철은 고향인 의령을 떠나
진주로 시집 간 둘째 누나 이분시의 집에 가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둘째 누나 분시는 병철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발소였습니다. 

그렇게 병철은 12년간 길렀던 댕기머리를 순식간에 댕강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날은 자신의 '개화의 날'이라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병철이 진주로 온 이유는 새로 세워진 신식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1921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 지수 보통학교가 세워지는데
이는 지금의 지수 초등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허준이라는 인물이 인재 양성을 위해
땅을 기증하면서 세워지게 되는데 참고로 
허준은 GS를 창립한 허만정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1922년 3월, 짧게 이발한 병철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덕분에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 중에 구인회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훗날 락희화학공업사, 지금의 LG를 창립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학교를 같이 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2년 9월, 병철이 외갓집이 있던 경성, 지금의 서울로 올라와
수송 보통학교 3학년으로 다시 편입했기 때문입니다. 


경상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그는
처음에는 사투리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아 50명 중 35~4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예외적으로 산수 과목만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병철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끝까지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경성 수송 보통학교를 다니던 그는 보통학교 5학년, 
6학년 과정을 단기간에 속성으로 배울 수 있었던
중동 중학 속성과에 다시 편입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수료한 뒤, 
중동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제법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26년 12월 5일, 17살이 된 병철은 중동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박두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후 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병철은 갑자기 학업을 마치지 않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제대로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심을 아버지에게 전하게 되는데,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유학경비가 없었던 병철은 
자신의 형, 이병각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함안의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형의 친구는 병철에게 선뜻 500원을 내어주었습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3원 정도였다고 하니 500원은 정말 엄청난 돈이었는데 
그 돈을 선뜻 내준 형의 친구는 훗날 효성을 창립한 조홍제였습니다.

1929년 10월, 3년 간의 유학 준비 끝에 도쿄에 있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정말 처음으로 학업에 열심히 정진했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공장을 찾아다니며
일본 공업에 대한 것을 최대한 배우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그런 병철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지치고 힘이 쭉 빠지는 이상한 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일본 내에서 어떻게든 치료하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1931년, 병철은 회복을 위해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병철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와세다 대학을 중퇴했다.

지수 보통학교, 수송 보통학교, 중동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로 나에게는 졸업증서라는 것이 한 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당시 도쿄가 세계 중심지의 하나라는데, 그곳에서는 세계가 보이더라."
병철이 일본에서 앓았던 병의 정체는 티아민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각기병이었습니다.

 


3. 이병철의 방황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온 병철은 쉬면서 곧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학업에서 손을 떼자 좋지 않은 길로 빠지게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골패라는 도박에 빠졌는데, 골패는 숫자를 
점으로 표기한 패를 가지고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1928년에 낳은 장녀 이인희, 1931년에 낳은 장남 이맹희
그리고 1933년에 낳은 차남 이창희까지 세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병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새 골패 노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1934년 어느 날, 병철은 여느 때와 같이 하루종일 골패노름을 
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따라 밝은 달빛이 창 너머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달빛에 비친 쌔근쌔근 잠든 세 아이가 병철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뜻을 세워야 해.' 그날 밤, 병철은 잠을 자려고 
했지만 생각이 많아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한 끝에 그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4. 이병철의 사업시작

며칠 뒤, 병철은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사업을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때, 병철의 아버지 찬우는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이 좋다'며 
300석의 쌀을 추수할 수 있는 재산을 사업 자금으로 내어주었습니다.
사업 자금이 생긴 병철은 부산, 대구뿐 아니라 경성까지 
직접 돌아다니며 사업 아이템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다 경남 일대에서 수확한 쌀을 항구도시였던 마산에서 
도정하여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는데
그 양은 무려 연간 수백만 석에 이르렀고 정미소가 부족해서 
도정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1936년 3월, 병철은 도정 사업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며 
친구인 정현용, 박정원과 함께 각자 1만 원씩 출자하여
3만 원으로 마산에 협동 정미소를 세웠습니다. 

당시 마산에 물자 운송수단이 많지 않아 운송비가 비쌌는데
병철은 이 점을 역이용해서 트럭 10대를 보유하고 있던 
일출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여 개인적으로 운수업도 시작했습니다.

병철의 첫 사업들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세 번째 사업을 준비하게 됩니다.
산수에 강했던 그는 쌀 값을 분석했는데, 당시는 일제의 농민 수탈 정책 
때문에 쌀 생산량의 절반을 소작료로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에 은행 대출을 더해
다시 농토를 사들여 쌀을 수확하더라도 소작료를 내고 
은행 이자를 갚고도 약간의 이익이 남았던 겁니다.

병철은 계획대로 조선식상은행 마산점에서 대출을 받아 김해 평야 
전체를 사들일 기세로 무섭게 토지를 늘려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1년 만에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연간 
일 만석의 쌀을 수확하며 사업을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5. 이병철의 파산과 재도전

그러던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중일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병철이 돈을 빌렸던 식산은행은 
대출을 중단했고 설상가상으로 땅값은 완전 폭락했습니다.
결국 병철은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가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버린 이병철 

하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찬우는 병철에게 3만 원이라는 거금을 다시 내어줬습니다.
당시 한 달 월급이 15원 정도였기 때문에 3만 원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습니다.
병철은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부산, 경성, 평향, 신의주, 원산, 흥남을 거쳐
중국의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까지 넓은 세상을 

여행하며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지 물색했습니다.

그러다 중국에서는 엄청난 규모로 상거래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2개월 간의 여행 끝에 그는 청과물과 건어물 등이
무역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38년 3월 1일, 병철은 아버지에게 받은 3만 원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250평 규모의 점포를 사들여서 청과물과 
건어물을 무역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3과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별을 뜻하는 성을 합쳐
가게 이름을 삼성상회라고 지었습니다. 
삼성상회는 대구지역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포항 지역에서 생산되는 건어물을 들여와 중국 대륙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했습니다. 

병철은 예전에 정미소를 하다 폭망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만 의존하는 것이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하고는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하여 제조업도 함께 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면 제품이 별표국수입니다. 
삼성상회는 꽤 안정적으로 운영되며 성장해갔습니다.
1939년, 사업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병철은 
또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로 술을 만드는 양조업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매물로 내놓은 '조선양조'라는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한편,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당연히 경제침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대박을 치던 물품이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습니다.
경영난은 무슨, 오히려 재고가 없어서 걱정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를 폭격한 진주만 공격이 일어납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부터 삼성상회든 조선양조든 생산량의 95%를 
일본의 군수물자로 강제 납품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6. 삼성의 2대 회장 이건희의 탄생

그런 가운데 1942년 1월 9일 병철과 두을 부부의 7번째 자녀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삼성그룹 2대 회장이 되는 이건희였습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7. 삼성상회와 조선양조, 삼성물산공사

광복 후, 병철은 계속해서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를 운영해 갔습니다.
특히 조선양조에서 청주를 만들어 월계관이라는 상표를 
붙여 팔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업은 점차 확장했지만 병철의 마음 한 켠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 경제 상황은 정말 암담한 수준이었는데 병철이 
판단하기에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국제무역을 하는 것이란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분명 위험부담은 굉장히 컸지만 병철은 그동안 벌어들인 
자금으로 국제 무역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경영을 과감하게 친구였던 
이순근에게 모두 맡기고 1947년 5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1948년 11월 종로 2가에 100여 평 규모의 2층 건물을 빌려서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여 마카오와 홍콩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국제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할 당시 투자자 중에는
앞서 언급되었던 형의 친구 조홍제가 있었습니다. 
병철이 쓴 자서전, 호암자전에 따르면
자신이 75%를 출자했고 나머지 투자자들이 25%를 출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홍제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는 자신이 
1,000만圓을 투자하고 병철이 700만圓을 투자하여
총 자본금 1,700만圓으로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자로 표기된 圓(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원'의 1000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지분 갈등으로 인해 훗날 이병철과 조홍제는 갈라서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고
어쨌든 설립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친형제와 같이 아주 돈독했습니다. 
한편, 회사 내부적으로는 사원이라면 누구나 회사에 투자를 할 수 있었고
투자한 만큼의 정당한 배당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삼성물산공사는 듣보잡 무역회사로 시작하긴 했지만
아주 안정적으로 사업을 키워갔습니다. 
그렇게 1949년에는 전택보의 천우사, 김인형의 동아상사,
김용주의 대한물산, 박홍식의 화신무역 등 그 당시 잘나가던 
대무역회사들에 이어 무역업계에서 거래액 7위 기록을 달성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 뒤에는 그 모두를 따라잡으며 1등 무역회사로 자리 잡게 됩니다.
덕분에 병철은 전택보, 설경동 등과 함께 일본 경제시찰단 
15명에 선발되어 한국 대표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8. 한국전쟁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쟁은 삼성물산공사가 그동안 이뤄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병철의 가족은 다른 사원들과 함께 트럭을 구해서 대구로 피난했습니다. 
벌써 전쟁 때문에 사업이 두 번이나 망한 병철...
그는 대구에 도착해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조선양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양조를 운영하던 경영진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장님, 양조장 운영이 잘 되어 3억圓 정도의 비축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 다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병철은 또 한 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내려가
1951년 1월 10일,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새롭게 설립했습니다. 
게다가 삼성물산공사 당시 홍콩에서 받지 못했던 3만 달러를 회수했는데
당시 환율이 달러당 2,500圓이었기 때문에 7,500만圓의 추가자금이 생겼습니다.
전쟁 중이긴 했지만, 삼성물산주식회사는 꽤 여유 있는 
자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주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하며 부산 국제시장 도매상에게 판매했고 
1년 만에 60억圓의 매출을 달성, 순이익은 20억원(圓)에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병철은 이것이 큰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치상으로는 분명 큰 금액이었지만
당시 전쟁의 영향으로 통화 남발과 물가 상승이 
되풀이되는 악성 인플레이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51년 당시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무려 531%의 물가 상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병철은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고 
소비 물자를 수입에 의존하기보다 원료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제조한 뒤 다시 수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9. 제일제당 창업

그러던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 협정으로 중단되었습니다. 
휴전상태가 시작되자 많은 회사가 무역업에 뛰어들며 경쟁이 심해졌습니다.

병철은 전부터 제조업으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정부가 수입대체산업 육성계획을 추진하면서
제조업에 진출하기 아주 적절한 시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병철은 시장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삼성물산주식회사에서 수입해오며 성공적으로 

매출을 올려주던 설탕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설탕을 제조하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설탕은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고
가격 또한 세계 시장의 3배나 비싸게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으로부터 원조받던 원료 중에는
설탕의 원료인 원당이 있었습니다. 

병철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잘 이용하여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후 부산 전포동에 설탕 제조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일본 다나카 기계로부터 제당 기계를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1953년 11월 5일 제일제당을 설립하게 됩니다.
수입설탕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품질의 제일제당의 설탕은 
수입품의 3분의 1 가격으로 출시됐습니다.
그런데 출시 초기, 사람들은 제일제당의 설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국내에서 제조되는 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산은 싸고 나쁘다는 막연한 불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제일제당의 설탕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1953년 당시 100%였던 설탕의 수입의존도는
1954년엔 51%, 1955년에는 27%, 1956년에는 7%까지 크게 떨어지며
수입대체라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 제일제당에서 만든 설탕 브랜드가 바로 '백설표'입니다.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되어 나온 뒤 지금의 CJ제일제당이 됩니다.
삼성물산에 이어 제일제당까지 계속해서 사업이 성공하면서 
병철은 새로운 기업을 하나하나 일으키는 창조의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10. 제일모직 창업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떠올렸습니다.
제일제당은 '식'에 해당하는 사업이었고 이번에는 
'의'에 해당하는 사업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국내 섬유산업의 상황은 아주 열악해서 
군용 모포 수준의 제품 정도만 생산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양복은 미군 군복을 염색한 것이었습니다. 
마카오를 통해 밀수한 영국제 복지로 맞춘 양복도 있었지만
일반 월급쟁이의 3달치 월급보다 더 비쌌습니다. 

그래서 이 양복을 입은 사람은 마카오 신사라고 불리며 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병철은 일반인들도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400년 전통 영국 모직과 상대가 되겠어?"
"제일제당에서 돈 좀 벌더니 세상이 만만하지?" 등의 싸늘한 반응만 되돌아왔습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걱정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국내 최초로 모직 공장을 짓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내 경영진은 작은 규모로 시작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병철은 생산원가를 낮추면서도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권유로 일본제 기계 대신 서독제 기계를 들여와서
대구 침산동에 7만평 대지를 확보하여 당시 최대 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제일모직 소모사공장 완공을 시작으로
1956년 초까지 방모, 직포, 염색, 가공 공장을 차례대로 완공했습니다.

한편, 공장이 건설되는 동안에도 원모 염색, 가공, 방직, 기계 등의 
여러 영역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 보내 6개월간 관련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일모직은 원단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덴텍스'입니다.
비록 영국산 모직만큼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국내 최고의 모직원단임은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영구산 모직의 5분의 1 가격으로 가성비가 뛰어났습니다. 

또한 병철은 서울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직접 양복점을 차리고 양복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양복점의 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는 꽃인 '장미'와
유럽의 양복지를 뜻하는 '라사'를 합쳐 '장미라사'라 지었습니다. 
하지만, 국산품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첫해에는 큰 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골덴텍스 양복을 일부러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역시나 시간이 흐르자 값싸고 품질 좋은 골덴텍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일모직의 성공 이후 모직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 생산한 모직만으로 완전 자급이 가능해지자
1958년 1월, 정부는 소모사 수입을 완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한 이후부터 

병철은 재물이 있는 가문, 재벌(財閥)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956년 이승만 정부는 공매불하를 통해 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원래는 정보 소유의 은행을 민영화하여 금융자율화를 
하고자 했으나 5번이나 유찰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정부는 불하조건을 조정한 뒤 재벌들에게 은행주를 사달라고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천광사, 지금의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을, 곰표로 유명한 대한제분이 상업은행을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삼성은 홍업은행 지분의 83%, 조홍은행 지분의 55% 등
4개의 시중은행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며 금융기관을 장악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병철은 호남비료 주식 45%, 한국타이어 주식 50%,
삼척시멘트 주식 70% 등 여러 기업의 주식들도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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